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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일, 사람의 일(마태복음 16:21-24)

목사님 0 683

    

 

 

       어제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지 575주년이 되는 한글날이었지만  우리나라 주거문화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아파트에서 한글 이름을 찾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부동산업계에 따르면 올해 시공능력평가 상위 50위 안에 드는 건설사 가운데 주택 상표에 순우리말만 사용하는 곳은 한 곳도 없다고 합니다.

'꿈에 그린'이라는 순우리말 상표로 유명했던 한화건설은 2019년 '포레나'라는 외국어 상표를 출시했고 이후 기존 꿈에 그린 아파트 단지마저 포레나로 바꾸는 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이 밖에 대형 건설사들의 아파트 브랜드는 모두 외국어로 바뀌었습니다.

삼성물산 '래미안', 현대건설 '디 에이치'와 '힐스테이트', 

대림산업 '아크로', GS건설 '자이', 포스코 건설 '더샵', 대우건설 '푸르지오' 

현대산업개발 '아이파크', 롯데건설 '롯데캐슬'과 '르엘', 

여기에 한국토지주택공사(LH)마저 기존 주거 상표였던 '뜨란채', '천년나무'를 대체하는 '휴먼시아'나 '안단테'와 같은 상표를 개발해 외국어 작명에 가세.

생각해보니 아파트 이름 하면 현대아파트, 한양아파트, 삼호, 삼익, 건영 등등

 

어제는 575번째 한글날이었습니다. 송창식의 가나다라마바사아.

한글 사랑이 필요한 때. 자기 나라 글을 가지고 있는 나라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브라질이 축구는 잘하지만 포르투칼어를 씁니다. 

그 외의 남미국가들은 대부분 스페인어를 씁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훌륭한 조상들의 덕분에 한글을 가지고 있고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은 한국어를 씁니다. 민족이란 같은 언어를 쓰는 집단.

일제 시대에 조선어와 조선 글자는 반드시 사라져야 할 조선 역사와 문화의 정수였습니다. 1929년에 ‘조선어학회’를 만들어 우리 말을 보존하려고 노력.

 

특히 기독교와 한글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당시 한글 보급 전파의 일등공신은 외국인 선교사들과 국내의 기독인 학자들이었습니다. 

1893년 1월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는 “모든 문서는 한문을 섞지 않고 순전히 한글로 인쇄한다”는 방침을 정했습니다. 

그후 1911년 신구약 전체가 한글로 번역돼 ‘성경젼서’가 출간되었습니다. 

서울 연동교회 초대 담임목사를 지낸 게일 선교사가 1909년 기고한 글에는. “이런 문자(한글)가 400년 동안 긴 잠을 자다가 자명종 소리에 깨어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명을 전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조선총독부는 1940년 이후 교회에서도 일본어로 설교하도록 지시했지만 

교인들은 계속 한글 성경과 찬송가를 사용해 예배들 드렸다고 합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나이가 얼마이든지 간에 살아오는 중에 경험한 것은 세상에 

못 믿을 것은 이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오죽하면 우리나라 정선 강원랜드 카지노에도 영구적으로 출입을 금지해달라고 스스로 신청한 ‘영구출입제한 신청자’가 1만2천여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렇게 자기 자신을 못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 못 믿을 자기 자신에 근거해서 다른 것을 판단하려고 

했던 대표적인 인물인 베드로가 등장을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도 수제자입니다마는 실수도 많이 한 사람입니다. 저는 베드로를 생각할 때마다 나하고 어쩌면 그렇게 똑 같은지 탄복을 합니다. 오늘 본문 앞에도 보면 예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질문을 하자 베드로가 그 위대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를 크게 칭찬하시면서 ‘베드로’라고 하는 귀중한 이름을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헬라어로 ‘페트로스’인데 반석, 돌이라는 뜻입니다. 

그뿐 아니라 ‘천국열쇠’를 베드로에게 줍니다.

위드 코로나 시대가 되면 여행을 떠나게 될텐데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여러 가지 석상을 많이 만날 수 있는데 베드로의 석상은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손에 열쇠를 쥐고 있는 분이 바로 베드로입니다. 

반면에 손에 큰 칼을 가지고 있는 분은 사도 바울입니다. 

말씀의 검을 가졌다고 해서 이렇게 나타냅니다. 

자 예수님께서 그와 같이 엄청난 칭찬을 하고 나서 베드로는 사뭇 우쭐해 져서 엄청난 실수를 하게 되고, 주님한테서 큰 책망을 받게 됩니다. 예수께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하십니다. 

조금 전까지 ‘베드로, 반석’이라 하셨는데 지금은 ‘사단’이라 하십니다. 

 

오늘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예수님을 위한다고 한 고백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말씀은 베드로의 그 고백 속에 사단의 시험이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역사는 돌아보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그런 마음에 사단이 틈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의 생각에는 풍랑을 잠재우시고, 죽은 자도 살리시는 능력을 가지신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자기 나름대로 가진 메시야관에 근거해서 판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나름대로 보는 성경, 자기 나름대로 이해한 메시야의 나라만 생각하고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번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도대체 베드로가 왜 이렇게 되었겠습니까?

자신의 욕망과 욕구에만 얽매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소중한 진리를 

알아들을 귀가 없었던 탓입니다. 마음 문이 열려 있지 않았던 탓입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를 져야 하겠고 삼일 만에 부활하리라”

얼마나 소중한 말씀인데, 이 말씀을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한 것입니다. 

언제나 욕망의 노예가 되어 있는 사람들은 덮어 놓고 자기 말만 합니다.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모릅니다. 하나님의 귀한 말씀을 그대로 받아 들일 수가 없습니다. 교회에 앉아서도 딴 생각만 합니다. 

베드로도 그 때문에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책망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원문의 뜻을 보면 ‘내 인도자가 되지 말고 내 추종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앞질러 가면서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 하고 하나님의 뜻마저 제멋대로 해석하여 원망할 생각 말고 뒤로 물러가 주님을 따르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왜 사단이 있느냐? 많은 사람들이 질문을 합니다마는 하나님께서 왜 사단을 만드셨는지, 어째서 사단이 있도록 허락하시는지, 여기서는 구구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하고 사단이 있다는 그 사실에서부터 출발을 합시다. 

사단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사단의 시험에 들기 때문이지 사단의 시험에 빠지지만 않는다면 사단이 제 아무리 많은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내가 유혹을 이길 수만 있다면야 사단의 시험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사단의 유혹은 누구에게나 있고 어디에나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도 광야 40일 금식 후에 엄청난 시험을 겪지 않으셨습니까? 

하물며 우리들 사람에게야 얼마나 많겠습니까? 

 

“마귀는 세 가지 방법으로 사람을 시험한다”고 합니다. 

첫째는 ‘누구든지 죄를 지으니까 너도 죄지어라, 너만 죄인이냐, 다 죄인인데’하는 유혹입니다. 그 두 번째는 ‘이 정도의 것이야 뭐 어떠냐, 별 것 아니다’하고 약간의 죄는 괜찮다고 유혹을 합니다. 

셋째는 ‘딱 한 번만’입니다. 이번만 죄를 짓고는 다시는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니 마지막으로 한 번만 하라는 것입니다. 

이같이 사단의 유혹은 참으로 무섭고 간교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사실을 깨닫고 베드로전서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에덴 동산에서부터 겟세마네, 골고다까지, 그리고 저 성자라 불리는 사람들로부터 속세에 사는 모든 사람에 이르기까지, 사단의 유혹은 참으로 집요하게 따라 붙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그 시간에도 사단의 유혹이 있습니다. 

사단이 유혹을 하는데는 성역이 없습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단의 역사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만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먼저 사랑하는 자를 통하여 역사합니다. 

가룟 유다가 아니고 이 순간 왜 베드로에게 나타났습니까?

사랑하는 관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사랑하지 않는 관계, 내가 관심을 가지지 않는 일이라면 시험될 리가 없습니다. 내가 지극히 좋아하는 것, 내가 지극히 사랑하는 바로 그것에 시험의 여지가 있고 함정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일에는 흔히 마가 끼기 쉽다는 말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따라 바로 살아보고자 뜨겁게 믿으려 할 때, 거기에 사단의 유혹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에 참여하여 큰 일을 해 보고자 마음먹고 출발을 할 때, 거기에 사단의 시험이 있습니다. 

큰 뜻 품지 말고 큰 일 해드리려고 하지 말고, 한 걸음 한 걸음씩

 

기독교인들이 시험을 당함에 있어서 하는 몇 가지 오해가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지금 내가 당하는 시험을 우연하게 일어나는 일로 여기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참 애매하게 억울하게 그저 말려들었을 뿐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시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사람에게는 우연이라는 것이 있을지언정 하나님께는 결코 우연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는 필연일 뿐입니다. 그 사건, 그 시험,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고,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하나님의 확실한 경륜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겪고 있는 작고 큰 사건 하나하나에 하나님의 뜻이 있고 계획이 있습니다. 문제는 내가 그것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느냐, 받아들일 줄 아는 지혜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기 위해서 각자 각자 개별적으로 

사건을 통해서 꾸준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 다른 하나는 나를 예외시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당하는 시험은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만이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나만이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시험이 있고 그 질량은 똑 같습니다. 혼자서만 당하는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만이 별나게 당하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일을 점점 더 파국으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겪는 것을 나도 겪을 뿐입니다. 

보편적인 것입니다. 그 속에 내가 하나 끼여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한 가지를 더 말씀드리면 고통만이 시험이라고 여기는데에 또한 오해가 있습니다. 병들면 시험이라 하고 건강하면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실패하면 시험이라 하고 성공 하면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나에게 달갑지 않은 충고나 언짢은 소리를 하면 그걸 견디지 못하고 ‘시험 들었다’고 하고, 남에게 칭찬을 들으면 그 때는 좋아라 합니다.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을 해서 내 생각대로 되면 그것은 축복이요, 그대로 안 될 때에는 시험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험이란 언제나 있습니다마는 시험은 필요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필요하고 아니하고는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그 분량과 정도와 때도 하나님께서 정하십니다. 

이 사람에게는 이런 시험이 있어야 하겠다, 이 사람은 이렇게 다루어야 되겠다, 지금 내가 당하는 시험은 특별히 나에게 꼭 필요하다고 믿는 데서부터 신앙이 출발해야 합니다.

여러분, 시험은 당하는 것이 아니고 이겨내는 것입니다. 

약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손해보는 것이 아니고 유익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야고보서 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모든 시험, 모든 시련은 가치 판단을 새롭게 하고, 새로운 의미를 깨닫게 해 주는 것입니다.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구별해 주는 것입니다. 

시편 119:67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내 마음에 있는 쓸데없는 욕심, 버려야 할 허영심, 교만, 거짓. 이와 같은 찌꺼기를 모조리 없애야 하는 것입니다. 시험은 그러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버려 마땅한 것을 버리지 못하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에는 하나님께서 찍어 버리십니다. 여기에 아픔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픔이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순수하게 만듭니다. 

이 시험을 통해서 나 자신을 알게 하시고, 이웃을 알게 하시고, 온전히 하나님을 알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사단의 모든 시험을 다 이기고 주님께서 주신 십자가를 기쁘게 짐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예하게 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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