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이 임하시다, 사도행전 2:1-4, 183장
사무엘상 1-7장
지난 주 금요일부터 살을 빼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비만이라는 것이 죄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넋놓고 있으면 내 몸에 딱 달아 붙어서 잘 떨어지질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으로 하여금 포기하게 만듭니다.
살이 찌니까 점점 살 뺄 자신이 없어지고 해도 안될 것 같아 시작도 못하게 만드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작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시작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시면서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을 기록하면서 성령의 역사에 따라 기록하였기 때문에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이라는 별칭으로 불리웁니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는
초대 교회를 탄생시키고 확장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본문은 이런
성령의 역사가 시작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역사의 물결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으며 비린내나 풍기던 어부들이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자 진시황제도, 알렉산더도, 시저도 해결하지 못했던 죽음과 영생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이 아닌 그 무지랭이들이 성령시대 교회의 문을 열었습니다. 다락방에 모여 방문을 걸어 잠그고 죽음이 무서워 두려워 떨던 갈릴리 촌부들이 방문을 걷어차고 나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담대하게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의 생명을 예수 앞에 초개와 같이 버릴 수 있었습니다.
300년이 채 흐르기도 전에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가 그 앞에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313년 밀라노 칙령, 380년 데살로니가 칙령으로 국교로
무엇이 갈릴리 촌부들을 이토록 능력 있는 사람으로 만들었습니까?
성령의 강림, 성령이 임하자 사람이 달라져.
성령이 임하면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의 ‘씨뿌리는 비유’(18-23)를 보면 네 가지로 나옵니다.
길가, 돌밭, 가시떨기-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 좋은 땅
황무지를 옥토로, 내 마음 나도 몰라.
오늘날 우리들의 문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능력을 제한합니다.
자기 얄팍한 이성과 경험 안에서만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God is too small” - 하나님은 너무 작다!
그러나 여기 성령의 능력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을 보면 한 할머니가 나이 90에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약을 보면 한 처녀가 잉태하게 되었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사자는 그들에게 대답했습니다.
누가복음 1: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Nothing is impossible with God.”
하나님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고 천지를 창조하신 그 권능으로 가정을 세우시고 주님의 보혈을 흘리시어 교회를 친히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모든 것이 보기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날에도 보기 좋았더라. 둘째 날에도 보기 좋았더라. 셋째 날에도, 넷째 날에도, 다섯 째 날에도 여섯째 날에도 하나님은 모든 것이 보기 좋으셨습니다. 그런데, 처음으로 보기 좋지 못하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이루는 놀라운 연합의 신비를 아담이 경험하도록 여자를 만들고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가정과 이스라엘 공동체는 죄악과 불순종으로 실패하였습니다.
그 후 하나님은 더 이상 실패하지 않는 공동체를 세우시길 원하셨습니다.
그 일은 먼저 죄를 없애는 일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관계를 파괴하는 모든 죄를 대속해 버리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기도하는 120문도들에게 성령으로 임하셨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교회라는 공동체가 탄생한 것입니다.
참다운 교회 공동체가 탄생하던 순간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십시다.
1절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성령의 역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곳에 나타납니다.
우리가 힘써 모일 때 주님이 일하십니다.
교회생활에서 공동체의 중요성을 아시겠습니까?
우리교회의 셀모임은 해도 좋고 안해도 좋은 그런 모임이 아닙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성령의 충만을 경험하고, 사랑을 경험합니다.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셀모임을 통해서 서로 위해 기도하고 서로 연락하는 천국 공동체로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말이 통하고 마음이 통하고 사랑이 통하는 신앙 공동체의 경험!
세상과 싸워 이길 수 있는 힘이 거기서 나옵니다.
험한 세상을 승리하는 능력이 거기 있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을 살펴보십시오. 신앙이 살아있을 때 열심히 모입니다.
모임의 자세가 나태해졌다면 문제가 생기고 있는 겁니다.
모임을 등한시 하는 사람은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사무엘 당시 미스바에서 모였을 때 성령이 임하여 블레셋을 물리칠 능력을 받았습니다. 에스라 부흥운동도 백성들의 모임으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오순절날 성령 강림도 120문도가 모인 그곳에서 일어났습니다.
단순히 공간적으로 한 곳에 모여 있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잡히면 죽을 줄 알고도 모임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208장
사도행전 1:5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성령이 그들에게 당장 임할 수는 없었을까요?
먼저 그들은 공동체 안에서 결속해야 했던 것입니다.
공동체가 형성되지 않고서는 성령이 임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우리들은 신앙인들의 모임을 최우선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일이 바빠서, 피곤해서. 신앙 생활이 최우선으로 가지 않으니까 피곤하고 짜증나고 일이 잘 안 풀리고. 같은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생활이 나아지는 사람들이 있고, 그냥 그대로 사는 사람들의 차이,
요한복음 16:33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환난을 당하는 게 일상.
환난을 당하면 자꾸만 세상에서 해결하려고 하는데 해결이 됩니까?
하나님께 집중해야지 해결,
목사님, 지금 골치 아픈 일 해결하고 신앙생활 열심히 하겠습니다.
120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언어가 다르고 습관이 다르고 문화가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 중엔 배운 사람, 못 배운 사람, 유대인과 이방인, 온유한 사람과 괴팍한 사람,
그런데 오늘 말씀에 의하면 그곳에 모인 사람 모두가 성령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그곳은 이미 은혜의 공동체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잘 타는 장작불 속엔 생나무를 넣어도 잘 타듯이 은혜의 자리엔 믿음이
약한 사람이 함께 있어도 쉽게 은혜를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저는 우리 새하늘 교회가 은혜의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성령의 역사는 어떻게 나타났나? 소리와 보였다.
본문 2절입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헬라어나 히브리어에서 바람과 성령은 같은 단어로 쓰여집니다.
바람이 불지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바람은 만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으나 우리가 다 느낄 수는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 바람 같은 소리가 급하고 강하게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본문 3절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이처럼 성령은 눈을 열어 보게 하는 역사로 나타납니다.
눈이 열려야 교회의 비전이 보이고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 보입니다.
일찌기 사도 바울은 섬겨야 할 교회가 보였고 그래서 터키에서 그리스로 건너가지 않았습니까? 유럽으로 기독교 전파.
2004년에 교회를 개척하고 교인 분들과 같이 세 번 성지 순례를 갔는데
그 첫 번째가 2008년 4월에 이스라엘로 성지순례를 간 것이었고,
두 번째가 2010년 5월에 그리스, 터키를 다녀 온 것이었고,
그리고 2014년 5월에 이태리를 다녀 온 것입니다.
두 번째 성지 순례 마지막 지점이 그리스의 ‘까발라’(Kavalla)라는 도시였는데, 인구 약 8만 명의 자그마하고 아름다운 항구 도시입니다.
이곳에서 하룻밤을 자면서 밤중에 그 아름다운 항구를 거닐었던 기억이 납니다만 이 작은 항구도시는 기독교 역사상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까발라가 바로 사도 바울이 유럽에 최초로 발을 들여 놓은 항구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6장 11절에는 ‘네압볼리’라는 이름으로 나옵니다.
바울이 전도를 하는데 자꾸만 막혀요, 그래서 고민하다가 터어키 드로아,
트로이에서 마게도냐 사람이 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하는 환상을 보게 되고 건너가서 처음 발을 내디딘 곳이 네압볼리.
이 네압볼리에서 산 넘어 로마인들이 깔아 놓은 도로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는데 그 길을 따라 언덕을 넘어서면 빌립보.
유럽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
성령 강림의 결과는 - 한 마디로 「말이 통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천하 각국의 사람들이 거기 모여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 가운데 언어의 장벽, 문화의 장벽이 무너졌고 대화가 시작되고 교제가 이루어지고 사랑의 공동체가 형성되었습니다.
부부간에도 일생을 살아가지만 말이 안 통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 사람은 유식하고 한 사람은 무식해서가 아닙니다.
마음이 안통하고 사랑이 안통하는 겁니다.
지금 부모들의 문제가 자녀들과 말이 안 통한다는 것입니다.
부모 자녀간에 사랑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집은 부모가 한국말을 하고
자녀들은 영어를 쓰는데도 문제가 없습니다.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와 듣는 자 사이에 신령한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사도행전의 주제는 성령이 사람들의,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마음도 열었다는 것입니다.
딱 한 번 만나서 말씀을 전했는데 듣는 사람이 예수를 영접합니다.
빌립보에서 루디아도 그렇게 사도 바울을 통해서 주를 영접했습니다.
성령이 마음 문을 열어서 낯선 사람을 만났어도 단 한 번 만나서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집을 열어서 교회를 합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보면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매우 귀중한 말씀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이 듣는다는 관계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들음에서부터 시작된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저는 여기 모인 모든 분들이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 변화는 오직 성령님이 임하여지만 온전하게 이루어집니다.
여러분들의 곤고한 그 심령에 성령이 찾아오시도록 간구, 갈구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님! 메마른 나의 심령에 찾아와 주시옵소서.
그리고 성령 충만함으로 온전히 변화되어 각자들의 삶의 영역에서
이 탈많고 상식적이지 않은 이 세상을 이겨 나가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